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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의 사진소묘

[이건행의 사진소묘] 나의 낙타는 불륜영화인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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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화양연화 포스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한국에서 초라한 성적을 거둔 영화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로 번역되는 <花樣年華>는 그러나 초라한 영화는 결코 아닌 것 같다. 뻔한, 어찌 보면 아주 통속적인 소제를 다뤘으면서도 격이 있다고 본 까닭이다.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거금 4만원을 들여 비디오테이프를 샀다. 소장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 판단은 적중했다. 생의 고비에서 허기질 때마다 보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있는 남자와 여자가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가까워진다. 그 계기는 둘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두 사람은 묘한 감정에 빠진다. 그 감정은 사랑의 감정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감정을 지독하리만치 드러내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의 가슴에 기댈지언정 포옹은 하지 않는다. 흔한 손잡기와 키스도 없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방에 있게 되었을 때도 어떤 기대상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자기 절제는 느리게, 느리게 화면에서 전개된다. 그런 까닭에 두 사람이 서로를 아주 고통스럽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깊이가 대단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슬로우 모션, 스톱 모션은 적절한 도구인 듯하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첼로 선율인 삽입곡 Shigeru Uchiyama의 <Yumeji> 테마도 느린 사랑을 더욱 애절하게 한다. 그 느린 사랑은 비애일 것이다. 동시에 격이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웅숭깊음일 것이다.

철지난 흑백영화 같은 것을 꺼내들고서 웬 사랑타령이냐고 타박을 해도 어쩔 수가 없다. 눈 씻고 도처에서 찾아봐도 낭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낭만없는 거리에서, 술집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불러봤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 대신 물질적 이해와 정치적 흥정만이 아주 정치하게 앞을 가로막을 뿐이다. 어디로 가야하나, 이 사막에서….

화양연화가 우스꽝스럽게도 한 순간 낙타 구실을 한다. 이런 때는 비디오테이프 등을 사 모으는 편집증이 후회가 되지 않는다. 낙타 등에 걸터앉아 소리쳐 보는 거야. “술을 마시려거든 목숨 걸고 마셔라,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걸고 해라.” 

이건행
한양대 국문학과를 나와 일간지와 시사주간지 등에서 사건, 미술, 증권 담당기자로 일했다.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의 <창>으로 영화화)를 출간했으며 현재는 시창작에 몰두하면서 분당 서현에서 인문학 카페인 '봄언덕'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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