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리 미술관: 흐릿함 속에서, 1945년 이후 현대미술의 또 다른 시선 >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본문 바로가기

한지수의 봉주르 파리

dc6844e799399dddb82e7941c1448de0_1729312633_4636.jpg
 


오랑주리 미술관: 흐릿함 속에서, 1945년 이후 현대미술의 또 다른 시선

본문

Musée de l’Orangerie : Dans le Flou, une autre vision de l’art de 1945 à nos jours 
2025년 4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오랑주리 미술관은 19세기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상주의와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모네의 수련 연작으로 빛나는 곳으로, 자연과 빛의 흐름을 흐릿하면서도 섬세하게 포착한 인상주의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미술관 지하의 상설전시에서는 르누아르, 세잔, 마티스 등 근현대 거장들의 대표작들을 관람할 수 있다. 상설전의 작품들은 다양한 미학적 실험과 시대 정신을 담아내며 오랑주리 미술관을 예술적 탐구의 장으로 완성한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849_3092.jpg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11_8492.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이번 특별 전시 ‘흐릿함 속에서’에서는 전후 미술에서 흐릿함이 어떻게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는지를 탐구한다. 다채로운 매체와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모여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제시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오랫동안 예술가들에게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회화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훗날 몰입형 대형 설치작업을 예고하는 선구적인 작업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모네의 이 거대한 수면 풍경을 감싸는 흐릿함(le flou)은 그간 모네의 시력 저하라는 질병 탓으로 거의 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이 모호함을 모네 말년의 작품 세계에 있어 하나의 자율적이고 의식적인 미학적 선택으로 이해하며 그 계승과 영향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20_3992.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흐릿함을 통해 현대와 동시대 조형예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연다. 선명함에 대한 결핍으로 간주되던 흐릿함은 사실상 불안정이 지배하고 가시성이 흐려진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 탁월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 위에서 형성된 이 흐릿함의 미학은 정치적인 차원을 갖고 펼쳐진다. 오랫동안 예술의 근간이 되어왔던 데카르트적 식별의 원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고 가시적인 것에 대한 확신이 붕괴된 자리에 예술가들은 새롭고도 불확실한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변화무쌍함, 혼돈, 운동성, 미완성, 의심 등을 새로운 예술 재료로 삼게 되며 의도적으로 불확정성, 비식별성, 암시를 선택한다. 자연주의적 선명함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선 대신 다의성을 지향하고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관람자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28_6883.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전시는 연대기적 구성 대신 주제에 따라 구성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흐릿함의 미학적 기원을 살펴보며 인상주의가 자라온 당대의 지적·과학적·사회적·예술적 변화를 조망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감각적 양상을 탐색하고 볼 수 있는 것의 경계 위에서, 흐릿함은 불안정함을 노출하는 동시에 다시금 세계를 매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이후 전시는 세 개의 주요 섹션으로 구성되며, 회화, 비디오, 사진, 설치 작업들이 서로를 비추고 대화한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39_0514.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흐릿함의 미학은 현대 이전 시기에도 이미 존재했다. 그것은 형태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고 풍경 속에 안개 같은 효과를 더하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 말, 인상주의는 이 흐릿함을 절정에 이르게 하며 인물의 형상이 해체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게다가 막 태동한 사진술은 기계적인 제작 방식 자체에서 비롯된 흐릿함을 작가 주관성의 표시로 끌어안았다. 예술가의 시각을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상징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공명을 일으킨다. 그들은 내면의 자아를 탐구하며 흐릿함을 통해 평소 선명한 시선이 의식에서 숨기는 것들을 드러냈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48_4298.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흐릿함 효과를 활용하는 예술가들은 우리의 인식 방식을 질문하고 시선의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제안했다. 현실을 단일한 해석으로 읽는 습관을 벗어나게 한 것이다. 그들은 과학 어휘를 빌려 미세한 차이에서 우주 광대한 영역까지 가시성의 경계들을 탐구한다. 전통적인 재현의 기준을 흔들며 구상과 추상의 대립보다 모호함을 택한다. 광학적 효과로 관객의 시각 예민함을 장난스럽게 시험하여 시선을 불안정하게 해 시각이 스스로를 자각하도록 이끈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60_0237.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흐릿함 미학의 정치적 차원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수용소의 실상이 밝혀지고 표현 불가능한 것을 마주한 가운데 흐릿함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되었다. 오히려 흐릿함은 초점을 맞추도록 강요하여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그 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이미지의 지위와 가치를 의문시하면서 예술가들은 20세기 역사를 관통한 비극과 최근의 위기들을 시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79_2762.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세계는 우리가 윤곽을 그리려 애써도 흐릿하고 어떤 초점은 결국은 덧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체성 또한 흐릿하고 붙잡기 어려우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불확실한 기억과 현재의 고정된 재현을 거부하는 태도 사이에서 흐릿함은 정체성 탐구가 된다. 기술적 순진함의 결과이자 순간의 자발성을 담보하는 아마추어 사진의 흐릿함은 가장 진실한 삶을 포착하며 자주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학이 허용하는 변형 효과는 인간 재현 속에 스며든 야성의 일부도 드러낸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89_6718.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인상주의가 포착한 찰나의 순간과 흐릿한 움직임이 현대미술에 어떻게 재탄생했는지를 마주하는 경험은 흥미로웠다. 순간의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의식된 미학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흐릿함은 단지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불안정한 현실과 인간 내면의 불확실성을 담아내는 하나의 언어였다. 선명함을 강요하는 시대에, 흐릿함이라는 모호한 시선이 주는 힘과 위로가 깊게 다가왔다. 불확실함을 감싸 안는 이 미학은 우리 삶의 불안과 희망을 함께 품어지는 듯하다.

9baa8dae4e263762be5c9fc124c8b390_1754585598_356.jpg
 ⓒ Musée de l’OrangeriePhoto: Han Jisoo  


볼탕스키, 베이컨, 아르퉁, 자코메티 같은 작가들이 ‘흐릿함’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엮인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시대와 매체, 표현 방식이 전혀 다른 이들이 공통의 감각을 공유하며 서로를 비추는 모습은 예술의 경계를 넓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전시는 명확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불확실하고 애매한 세계를 어떻게 예술로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명확함 대신 불확정성을 택하여 어쩌면 우리 시대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을 더 진실하게 포착했는지 모른다.



 


글ㆍ사진_한지수 (파리통신원ㆍ에디터)
소르본파리노르대학교에서 현대 문학 학사, 동 대학원에서 문화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마쳤다. 갤러리자인제노에서 파리 통신원 및 객원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도슨트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현재는 문화예술신문 아트앤컬쳐에서 에디터로서 다양한 리뷰를 제공하고, 프리랜서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한인유학생회의 창립멤버이며 프랑스 교민지 파리광장에 문화 및 예술 관련 기사를 기고하고 있다.



전체 15 건 - 1 페이지




dc6844e799399dddb82e7941c1448de0_1729312774_3745.jpg
 



게시판 전체검색
다크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