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회색빛 하루에 작은 씨앗을 심을 때 > 최유림의 그림책 마음 화실

본문 바로가기
🇰🇷
🇺🇸
🇯🇵
🇨🇳

최유림의 그림책 마음 화실

[7강] 회색빛 하루에 작은 씨앗을 심을 때

본문

(글: 최유림 (비작(주) 대표 / 작가, 예술교육콘텐츠 기획자)


오늘의 그림책 : 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리디아의 정원』 (시공주니어)

삶은 때때로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데려다 놓습니다.
익숙한 사람들 곁을 떠나야 할 때가 있고, 마음 편히 기대던 공간과 갑자기 멀어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닌데도 그 길 위에 서야 하고,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죠. 그럴 때 마음은 쉽게 회색빛이 됩니다. 낯선 얼굴, 낯선 거리, 낯선 하루들 사이에서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희미해지곤 합니다.

8f71ce44313c698eaadf731fdb6508c4_1783188295_3202.jpg
 
 이미지츌처: 『리디아의 정원』 (시공주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자리에서도 무언가를 심습니다. 모든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쉽게 장담하지도 않고, 거창한 희망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시작합니다. 마른 흙에 물을 주고, 창가에 화분 하나를 놓고,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씨앗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사라 스튜어트와 데이비드 스몰의 그림책 『리디아의 정원』은 바로 그런 마음을 보여줍니다. 삶이 나를 낯선 곳으로 밀어냈을 때, 그곳에서도 어떻게 나만의 작은 생명을 심을 수 있는지를 다정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한 작은 정원사

대공황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리디아 그레이스 핀치는 가족을 떠나 도시의 외삼촌 집으로 가게 됩니다. 리디아가 도착한 곳은 시골집처럼 따뜻하고 넓은 공간이 아닙니다. 외삼촌은 빵집을 운영하는 무뚝뚝한 사람이고, 도시는 낯설고 복잡하며 어딘가 차갑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리디아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씨앗과 구근을 챙겨 옵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며, 낯선 도시에서의 시간을 하나씩 견뎌냅니다. 리디아의 편지에는 슬픔도 있고 그리움도 있지만, 이상하게 그 속에는 쉽게 꺼지지 않는 밝은 기운이 있습니다. 그것은 꽃을 심는 마음입니다.

리디아는 빵집의 창가에, 작은 틈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공간에 씨앗을 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일처럼 보입니다. 도시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려운 형편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리디아가 심은 씨앗은 조금씩 싹을 틔우고, 회색빛 공간에는 천천히 색이 번지기 시작합니다.


8f71ce44313c698eaadf731fdb6508c4_1783188310_1465.jpg
이미지츌처: 『리디아의 정원』 (시공주니어)
 

씨앗은 아직 보이지 않는 희망입니다

씨앗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너무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고,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죠. 그래서 조급한 마음으로 보면 씨앗은 쓸모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디아는 씨앗을 믿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 안에 이미 피어날 시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처럼, 묵묵히 흙을 만지고 물을 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원 가꾸기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씨앗들이 있습니다. 오래 잊고 있던 취향, 다시 시작하고 싶은 공부,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다정한 말, 나를 살리던 작은 습관들. 너무 작아서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작은 생명들입니다.

우리는 힘든 시기를 지날 때 자주 큰 변화만을 기다립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완전히 좋아지고, 누군가가 나를 단번에 구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회복은 때로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회복은 아주 작은 씨앗처럼 옵니다. 오늘 한 번 창문을 여는 일, 말라버린 마음에 물을 주듯 짧은 일기를 쓰는 일, 내 공간 한켠을 다시 정리하는 일.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어느새 마음의 흙을 조금씩 부드럽게 만듭니다.

8f71ce44313c698eaadf731fdb6508c4_1783188319_914.jpg
이미지츌처: 『리디아의 정원』 (시공주니어)
 


웃지 않는 마음에도 꽃은 피어납니다

리디아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무뚝뚝한 외삼촌을 웃게 만드는 것입니다. 외삼촌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뜻한 말을 많이 해주는 사람도 아니고, 리디아의 밝은 마음에 금세 환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리디아는 그런 외삼촌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왜 웃지 않느냐고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조르지도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건넵니다. 꽃을 심고, 공간을 가꾸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옥상에 비밀스러운 정원을 만들어갑니다.

어떤 마음은 말로 열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꽃이 피는 시간만큼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리디아의 정원은 외삼촌을 향한 조용한 초대장 같습니다. “여기에도 아름다운 것이 자랄 수 있어요.” 하고 말없이 건네는 마음이지요.

마침내 옥상 정원이 드러나는 순간, 외삼촌의 굳은 마음에도 아주 작은 변화가 찾아옵니다. 큰 웃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는 것, 리디아가 심은 생명력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머무는 곳을 조금씩 살리는 힘

리디아의 아름다움은 어려운 현실을 모른 척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떨어져 있고, 낯선 도시에서 지내야 하며, 무뚝뚝한 외삼촌의 빵집에서 생활합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리디아의 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리디아는 자신이 있는 곳에 꽃을 심음으로써, 그곳을 조금씩 자기다운 공간으로 바꾸어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환경을 당장 바꿀 수는 없습니다.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머물러야 할 때도 있고, 낯선 관계와 상황 속에서 버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내가 지킬 수 있는 작은 생명 하나는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의 나를 조금 덜 메마르게 하는 일, 내가 머무는 공간에 작은 빛을 들이는 일, 누군가의 굳은 마음 앞에 조용한 꽃 한 송이를 놓아두는 일 말입니다.

어쩌면 희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매일 물을 주는 손길에 더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날에도, 흙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자라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당신이 회색빛 하루를 지나고 있다면, 자신에게 너무 빨리 절망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피지 않았을 뿐, 당신 안에도 작은 씨앗 하나는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자, 이제 당신의 마음속 정원을 가만히 들여다볼까요?
회색빛 하루 속에서도 당신이 지켜내고 싶은 작은 씨앗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오늘 당신이 머무는 자리에, 어떤 꽃 하나를 심어볼 수 있을까요?



글ㆍ사진_최유림 (비작(주) 대표)
임상미술치료 연구 및 예술교육 기획자.
그림책의 미학적 가치를 심리회복와 결합하여, 어린이와 성인의 마음 성장을 돕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웹: bejak.co.kr / 인스타그램: @i_bejak




게시판 전체검색
다크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