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 예술은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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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ée d'orsay : L'art est dans la rue
2025년 3월 18일 – 7월 6일
오르세 미술관은 세느강 왼편에 자리한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원래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기차역이었다. 이후 섬세한 개조를 거쳐 1986년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은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예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 반 고흐, 고갱 등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거장들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이번 봄에 진행되는 특별 전시 <예술은 거리에 있다>는 오르세의 소장품에서 잠시 벗어나, 거리와 인쇄물이라는 대중적 매체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한 장면을 담아낸다. 19세기 말 파리의 문화와 감각을 생생히 보여주며 예술이 거리로 스며들던 순간을 되짚게 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과의 협력으로 공동 기획된 이번 전시는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꽃피운 삽화 포스터의 눈부신 부흥을 총 23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통해 조명한다. 포스터뿐 아니라 회화, 사진, 의상, 조각, 장식 예술품 등을 함께 아우르며 세기 전환기 파리 거리의 활기찬 풍경을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이처럼 방대한 포스터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파리 최초의 대형 기획전이기에 관람 내내 시선이 쉴 틈조차 없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19세기 후반 파리의 시각적 세계로 깊숙이 잠수하는 듯한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예술 포스터의 황금시대를 따라가는 여정 속에서 이를 가능케 했던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날카롭게 조망한다. ‘근대 포스터의 아버지’, ‘포스터의 왕’이라 불린 쥘 셰레(Jules Chéret)를 선두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외젠 그라세(Eugène Grasset), 알퐁스 무하(Alfons Mucha), 스테인렌(Steinlen), 툴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 등이 이 장르의 대가로 자리 잡았다. 예술 평론가들은 ‘근대 포스터’의 조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예술의 대중화라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주목했다. 포스터는 곧 거리의 색채이자 리듬, 그리고 시대의 맥박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부터 포스터는 수집과 전시의 대상, 즉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포스터 수집 열풍(affichomanie)이 번져 나갔고 포스터 전문 판매상도 등장하게 되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라 불리던 프랑스의 19세기 후반, 포스터의 눈부신 발전은 당대 활발히 논의되었던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이미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인쇄물을 통한 선전은 큰 호황을 누렸지만 소비문화의 팽창과 함께 등장한 채색 삽화 포스터는 19세기 후반 내내 폭발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도시 전역에 퍼진 삽화와 채색이 더해진 새로운 형태의 시각적 매체 포스터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을 열었던 것이다. 빈곤과 시위의 거리는 지워지고 그 자리에 쾌락과 소비의 이상화된 거리 풍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카바레 문화, 스포츠의 등장, 과장된 여성성의 이미지처럼 억압에서 해방된 새로운 욕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게 된 것이다. 회화, 드로잉, 판화, 사진 등을 통해 이미지의 급격한 확산이 빈 벽, 목재 울타리뿐만 아니라 신문 가판대, 모리스 기둥, 공중 화장실, 지하철까지 도시의 모든 빈 공간을 점령하게 됐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게다가 오스만의 도시 정비 이후, 위생적으로 정돈되고 새롭게 기반 시설을 갖춘 근대의 거리는 단순한 통행의 공간을 넘어 정치적 표현과 사회적 요구가 터져 나오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그렇게 거리는 점점 시각적 풍경화가 되어가고 행인의 눈길을 붙잡기 위해 각축을 벌이며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포스터는 격변하는 사회의 변화를 포착하는 강력한 매개체로 기능하며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근대적 삶(la vie moderne)’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포스터 예술 현상이 단순히 미학적이고 기술적인 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구조와 경제 시스템, 사회 분위기와 정치적 흐름까지 아우르는 당대 전체를 비추는 문화적 거울이었던 것이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포스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시각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물론 그 이면에는 거센 반발도 존재했다. 무분별하게 쌓여가는 이미지들은 거리의 미관을 해치고 도시 경관을 어지럽히는 시각적 오염으로 여겨졌다. 자유로운 상업 활동과 표현의 자유가 낳은 이 과잉은 점차 통제와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키웠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도시의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보존 의식과 충돌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그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공공장소에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전시된 포스터는 곧 사회적 목적을 띤 예술이자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이상을 담았다. 아나키스트와 자유사상가들은 정치적 이미지의 초기 형태를 거리에서 실현하기 시작하며 특히 진보 언론의 광고 포스터가 그 시작점이 됐다. 도시 공간에서 대중의 의식을 자극할 벽화의 언어를 창안했고 공적 공간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적 수사법이었으며, 이는 정치적 포스터의 진화를 이끌게 된 것이다. 포스터를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시각화하기 시작했고 거리에 사상을 유통시키는 새로운 전략을 모색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포스터는 책과 신문의 광고를 넘어 노동조합, 정당, 혁명단체의 직접적인 표현 수단이 되었다. 거리의 벽을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삼은 선전 예술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정치 선전 포스터의 양식적 토대가 되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포스터의 확산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포스터 부착자(colleur d’affiches)’는 벨 에포크 시대 파리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와 작업 방식은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1883년 오페라 극장의 무도회에서 나폴레옹 왕자(le prince Napoléon)가 포스터 부착자로 분장하기도 했다. 문학가와 영화 감독들은 이들을 파리 거리 분위기를 조성하는 존재로 묘사했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엽서나 삽화를 통해 널리 퍼졌다. 하지만 보여지는 이미지와 달리, 그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현실의 고된 노동을 했고 특히 선거철이 되면 파리 시내에는 최대 1,800명의 포스터 부착자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19세기 후반, 광고, 통신판매, 대형 백화점은 소비문화의 폭발적인 확장을 이끄는 상업적 혁신으로 꼽힌다. 에밀 졸라가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Au Bonheur des Dames, 1883)』에서 “현대 상업의 대성당”이라 부른 이 백화점들의 성공은 무엇보다 빠르고 대량으로 판매한다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이 시기에 컬러 삽화 포스터는 대중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급부상하며 새로운 상업 전략의 핵심 무기가 됐다. 포스터는 점차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실험의 장이 되었고 단순하고 강렬한 그래픽 언어로 광고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직관화하며 이 흐름을 대표하게 된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삽화 포스터는 곧 근대 광고의 핵심 매체로 자리 잡았고 모든 상품군의 홍보 도구가 되었으며, 상품 성격과 타깃 소비자층에 맞춘 다양한 광고 메시지를 전개했다. 이로써 광고 타겟팅 전략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광고는 이제 남성뿐 아니라 일상 소비의 주체인 여성들과 어린이들까지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처럼 포스터는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의 확산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산업화로 격변한 사회의 현대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과 세계 인식까지 재구성하는데 일조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점점 포스터는 단순한 거리의 장식물을 넘어 수집의 대상이 된다. 예술 포스터에 매혹된 이들은 ‘아피쇼마니아크(affichomaniaques, 포스터광)’이라 불렸고, 전문 시장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시장은 판화 시장과 유사한 구조를 갖추었고 전시회, 상점, 전문 출판물이 뒤따랐다. 수집가들을 위한 희귀본 에디션도 존재했는데 이런 포스터는 거리에는 한 번도 붙지 않은 특별 인쇄본이었다. 알폰스 무하의 사라 베른하르트 시리즈, 툴루즈-로트렉의 포스터, 버전 차이, 희귀 인쇄, 변형본 등이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지녔다. 또 어떤 것들은 수집용으로 제작된 전용 가구에 전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포스터가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19세기 후반의 파리, 공연 산업은 전례 없는 활기를 띠며 치열한 경쟁 속에 번창한다. 공연 기획자들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러스트 포스터를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그랑 불바르(Grands Boulevards) 지구에는 수많은 공연 포스터가 공연장 입구의 이젤 위에, 혹은 거리 벽면에 부착되었다. 이 포스터들은 공연 일정에 따라 교체되었으며 파리 대중이 공유하는 문화적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포스터는 대중문화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많은 화가들은 공연장을 자주 드나들었고, 공연자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때로는 이 인물들의 이미지를 직접 구축하며 스타의 ‘상징적 얼굴’을 창조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 툴루즈-로트렉은 카바레와 콘서트 카페의 세계에 매료되어 당대 무대 인물들의 포스터를 다수 제작했다. 그의 포스터는 단지 인물 묘사를 넘어서 공연자의 개성을 도상화한 작품들이다. 모자, 장갑, 실루엣, 무대 위 몸짓 이러한 상징적 요소는 그 인물을 단순한 사람이 아닌 기억에 남는 스타로 만들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는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한 최초의 배우로 평가받는다. 1890년대 중반, 그녀는 포스터에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요구할 정도로 이미지 전략에 능숙했다. 이 시기 무하와의 협업은 전설적이고도 결정적인데, 그는 단 8점의 포스터로 '디바의 아이콘'을 구축했다. 무하는 이미 무대 위 그녀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었고 배우의 존재감을 포스터 속에 이상화하여 응축시켰다. 각 배역의 상징들을 화면 속에 절묘하게 배치하며 연극과 스타의 서사를 동시에 표현했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스타들의 이름이 거리의 포스터에 전시되는 동안, 또 다른 포스터들은 ‘세계를 보는 파리의 시선’을 무대화했다. 여기서 '세계'란 사실상 서구 제국이 식민지로 삼은 타자들을 의미한다. 이국적인 의상, 물건, 신체를 강조하는 공연을 볼거리로 선전했다. 등장인물들의 육체는 서구 관객에게 이질적이고 감각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강인함, 유연함, 균형감각 같은 특질은 종종 그들을 기이한 인간으로 묘사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문화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포스터들 속 묘사는 사람들을 고정된 특질로 환원했고, 20세기 대중매체에서의 인종차별 담론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시각적 기초를 제공했다. 결국 포스터는 인종주의를 유포하는 데 기여한 어두운 역할도 감당하게 됐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를 관람하면서, 포스터라는 매체가 지닌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단순한 광고물이었던 포스터가 예술적 가치로 변모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 포스터 산업이 절정을 이룰 당시의 작품들은 그 시대의 유행과 사회적 관심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시선과 감정을 상업적인 시각으로 재치 있게 풀어낸 작품들은 광고의 역할을 넘어서 예술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예술과 현실, 상업과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포스터는 시대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던 것이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포스터는 그 자체로 현실과 예술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듯했다. 거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업적 요소가 예술로 변형되어 관객에게 현실을 넘어서는 초대장을 건네주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예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듯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LU 과자의 포스터를 보고는 한참을 머물렀다. 아이들이 과자를 먹고 싶은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장면은 너무 귀엽고 친숙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그 브랜드의 역사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작은 광고 하나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았는지를 알게 되니 그 브랜드와 시대를 넘은 연결고리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포스터가 단순히 시각적인 요소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적 흐름을 반영하는 중요한 기록물임을 다시 한 번 깨닫았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전시를 보고 나온 길에, 또 하나의 상징적인 포스터를 마주했다. 바로 모리스 기둥이었다. 이번에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새 시즌을 광고하고 있었다. 내가 프랑스에서 완전히 귀국하기 전, 꼭 사가고 싶은 기념품이 바로 이 모리스 콜론 미니어처인만큼, 이 기둥은 프랑스의 문화 예술 광고의 상징이다. 광고라는 매체가 단순한 상업적 목적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세련되게 전개되는 방식이 참 인상적이다.
ⓒ Musée d'orsay, Photo: Han Jisoo
그런데 문득 한국에 돌아와서의 광고 환경이 떠올랐다.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한국에서는 광고라고 하면 주로 학원 광고, 입시 광고뿐이었던 현실이 너무 대비되어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광고의 역할이 상업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만 집중되는 모습을 보며,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가치가 담긴 광고가 얼마나 부족한지 아쉬웠다. 그런 현실을 마주하며,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분명히 광고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이 억제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파리의 거리 곳곳에서 세련된 예술적 언어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소통하는 모습을 그리워하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