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스: 오뜨 꾸튀르를 발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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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7일-9월 7일
Worth - Inventer la haute couture
프랑스 고급 패션의 정수를 상징하는 워스(Worth) 하우스에 헌정된 전시회가 진행중이다.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의 발명가’로 불리는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 1825-1895)를 중심으로, 파리 패션의 황금기를 보여준다. 영국에서 태어난 워스는 스웨덴 출신 파트너 오토 구스타브 보베르그(Otto Gustav Bobergh)와 함께 ‘워스 & 보베르그(Worth & Bobergh)’를 설립하며 패션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후 ‘워스’라는 단일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 하우스는 4대에 걸쳐 거의 한 세기 동안 프랑스 패션의 장인정신과 세련됨을 구현했다.
ⓒ Worth, Photo: Han Jisoo
이번 회고전은 쁘티 팔레의 1100㎡에 달하는 광활한 전시 공간에 400점 이상의 의상, 액세서리, 예술품, 회화, 그래픽 아트를 아우르며, 워스 하우스의 창조물뿐 아니라 그것을 이끈 주요 인물들을 집중 조명한다. 전시의 흐름은 제2제정기부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까지의 시대를 따라가며, 워스 하우스가 어떻게 창립자의 국제적 비전 아래 파리를 세계 패션의 수도로 굳히는데 기여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시의 첫 부분은 185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워스 하우스의 출발과 성장, 그리고 귀족 고객층을 되짚는다. 워스는 1846년 파리에 도착해 명망 있는 직물상 가젤랭(Gagelin)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곧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하게 된다.
ⓒ Worth, Photo: Han Jisoo
워스 하우스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메테르니히 공주를 시작으로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황후 외제니(Eugénie)까지 왕실 고객을 확보하며 파리 패션계를 장악했다. 1870년 보베르그와의 결별 후 ‘워스’ 단독 이름으로 운영되며, 낮의 의상부터 오페라 코트, 실내복인 티가운(tea gown), 무도회복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워스 스타일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 Worth, Photo: Han Jisoo
특히 워스를 애용한 유명 고객으로는 이탈리아의 프랑카 플로리오(Franca Florio), 미국의 레이디 커즌(Lady Curzon), 그리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귀르망트 공작부인(la duchesse de Guermantes)의 모델이 된 그레퓔 백작부인(comtesse Greffulhe)이 있다. 이 여성들은 워스 드레스를 입은 채, 카롤뤼스-뒤랑(Carolus-Duran), 라 간다라(La Gandara), 루이즈 브레슬라우(Louise Breslau) 등의 화가에 의해 초상화로 남겨졌으며, 이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예술로 영속시키고자 한 욕망을 드러냈다.
ⓒ Worth, Photo: Han Jisoo
1895년 찰스 프레데릭 워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장 필리프(Jean-Philippe)와 가스통(Gaston)이 가업을 이어받으며 하우스의 새로운 전기를 연다. 전시는 파캥(Paquin), 두세(Doucet), 드이에(Dœuillet)와 같은 파리의 주요 패션 하우스들의 생생한 장면을 재현한다. 1903년 자신의 아틀리에를 열게 되는 폴 포아레(Paul Poiret)도 워스에서 수련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수천 명이 일하던 워스 하우스의 작업장, 포장실, 사진 스튜디오, 고급 살롱 등의 내부 구조와 운영 방식도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전시의 마지막은 20세기 초, 워스 하우스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기에 집중한다. 장 필리프와 가스통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제정 시대 스타일을 재해석하면서도, 간결하고 길쭉한 실루엣으로 사회의 새로운 요구에 응답했다. 이 시기 워스는 전문 패션지 《라 가제트 뒤 봉 통(La Gazette du Bon Ton)》의 지지를 받으며 유행을 선도했다.
ⓒ Worth, Photo: Han Jisoo
1920년대부터는 가스통의 아들 장-샤를(Jean-Charles)과 자크(Jacques)가 하우스를 이끌었으며, 워스는 진정한 근대에 접어든다. 컬렉션마다 다양한 코트, 케이프, 데이 드레스, 이브닝 드레스를 선보이며 ‘워스 블루’라는 시그니처 색상이 확립된다. 1924년에는 첫 향수 Dans la Nuit(밤 속에서)를 출시, 이후 Vers le Jour, Sans Adieu, Je Reviens 등 다수의 향수를 라리크(Lalique) 디자인의 보틀에 담아 발표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향수 Je Reviens를 오스모테크(Osmothèque)와 협력해 감각적으로 재현하며, 관람객은 시각을 넘어 후각으로도 역사의 숨결을 체험할 수 있다.
ⓒ Worth, Photo: Han Jisoo
마지막으로 저널리스트 로익 프리장(Loïc Prigent)이 제작한 네 편의 영상이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각각의 영상은 워스의 대표 의상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복원의 뒷이야기까지 담아낸다. 영화의 일부 장면과 청취 스테이션도 마련되어, 당시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생생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 나게 전달한다. 이 전시는 단순한 회고를 넘어, 한 시대를 주도했던 전설적인 브랜드의 숨결을 되살리며 ‘오트 꾸튀르’라는 시스템과 ‘그랑 꾸띄리에(grand couturier)’라는 창조자의 개념이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식 우아함과 사치의 정점, 그 시작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개인적으로 패션 전시에 대한 거리감이 있었다. 세상의 빛나는 일부를 위해 존재하는 일시적 유희, 사치와 과시가 결합된 것이 내게 있어 ‘패션’이라는 단어가 호출하는 이미지였다. 생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닿기 어려운 세계라는 느낌 때문에 패션 전시를 가면 뭔가가 소외당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문을 조금은 느슨하게 열어두고 있었다. 더 이상 유행의 촉수를 재촉하는 쇼윈도가 아닌, 하나의 시대정신과 자부심의 서사를 펼쳐 보이는 공간이었다. 단지 옷을 전시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장인이 어떻게 패션이라는 언어로 시간을 조직하고, 권위와 욕망, 이상과 현실을 직조했는지를 보여주었다.
ⓒ Worth, Photo: Han Jisoo
패션 문외한에게 이 전시는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왔다. '옷'이라는 물성이 어떻게 역사와 미학과 정체성을 아우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시간이었고 더 이상 패션은 닿을 수 없는 먼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사치부리고 화려하게 입는 옷이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 세계에 위치시키고 기억되길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실과 바늘로 대답했던 이의 이야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