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0일 - 8월 31일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 Silla — l’Or et le Sacré, Trésors royaux de Corée (57 av. J.-C.- 935)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시아 미술 전문 박물관이자 유럽 최대 규모의 아시아 예술 컬렉션을 소장한 기관이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문화유산을 폭넓게 소개하며 아시아 문명의 역사와 예술을 조명해 왔다.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등 한국의 주요 기관과 협력해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신라 문명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이번 전시는 왕실의 황금 유물부터 불교 미술에 이르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이어진 신라의 역사와 예술, 정신세계를 입체적으로 소개한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이번 전시는 약 천 년 동안 예술, 종교, 정치 권력이 서로 긴밀하게 결합하며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운 신라 왕국을 새롭게 조명한다. 중세 한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신화에서부터 왕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이를 통해 신라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화적 기억을 살펴보며, 정치·종교·미학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창적인 문명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준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산과 거대한 고분, 사찰, 그리고 현대 도시가 공존하는 경주는 지금도 신라 문명의 흔적을 간직한 살아 있는 역사 공간이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문화유산 보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소개된다. 4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이어진 '마립간 시대'는 김씨 왕실의 성장과 함께 신라의 국가 정체성이 확립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황금은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소재가 되었으며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 곡옥 장신구, 정교한 금속 공예품, 동물 형상의 토기 등은 뛰어난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유물들은 신라가 일본, 중국, 초원 지대, 중앙아시아를 거쳐 지중해 세계에 이르는 국제 교역망과 활발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증명한다. 정치적 권위와 예술적 아름다움이 결합하면서 신라만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가 탄생한 것이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676년부터 935년까지 이어진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를 수호하는 중심 종교로 자리 잡으며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과거 왕실 무덤을 장식하던 귀중한 재료들은 사찰과 탑, 사리기, 불상 등 불교 미술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철, 금, 은, 유리, 석재로 제작된 다양한 유물들은 오늘날에도 경주의 풍경과 한국인의 문화적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는 국보를 비롯한 대표적인 문화재들이 대거 출품되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 밖에서 처음 공개된다. 탑과 왕릉, 거대한 유적은 현대 도시와 자연스럽게 공존하며, 관람객은 과거가 현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직접 걸으며 신라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신라에서 황금은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황금으로 제작된 신라의 금관은 귀족, 특히 김씨 왕실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식이었다. 금관은 왕과 왕비, 왕족, 그리고 일부 최고위 귀족들이 착용했으며, 금허리띠·귀걸이·펜던트·팔찌·반지 등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사용되었다. 또한 금·은·청동·토기로 만든 고급 식기들도 부장품으로 무덤에 함께 묻혔다. 각 왕국은 저마다 고유한 형태의 왕관을 발전시켰다. 신라의 금관은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신성한 나무를 형상화했고, 고구려의 관은 새의 깃털 문양을 활용했으며, 백제의 관은 우아한 꽃무늬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 이처럼 왕관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각 왕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적 표식이었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7세기까지 한반도는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대립하고 있었지만, 점차 세력 균형이 신라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신라는 당나라와 전략적 동맹을 맺고 결정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는 고구려도 멸망했다. 이후 신라는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해 당나라의 영향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통일신라(676~935)는 '불국토(佛國土)', 즉 '부처의 나라'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경주 인근 산속에 자리한 석굴암과 불국사는 이러한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당시 경주는 "하늘에 구름이 떠 있듯 탑이 솟아 있는 도시"로 묘사될 만큼 수많은 불교 건축물로 가득했다. 도심 한가운데에는 황룡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전시의 마지막 장은 이러한 신라 불교의 세계를 조명하며,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명상과 신앙의 매개체로 승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신라는 아름다움과 신앙이 하나로 어우러진 문명을 이루며 찬란한 문화적 정점을 맞이했다.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석굴암은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통일신라가 가장 번영했던 8세기에 건립되었으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석굴암 내부에는 명상에 잠긴 평온한 석가모니불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보살과 수호신, 천상의 존재들이 둘러싸고 있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특히 석굴암 부처 뒤편에 배치된 관세음보살은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상으로, 모든 중생을 향한 보편적 자비를 상징한다. 돔 형태의 천장은 우주를 형상화하고 있다. 중앙의 연꽃과 동심원, 달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조화를 이루며, 모든 존재가 부처의 빛을 향하는 질서 있는 우주를 표현한다. 석굴암에서는 건축, 조각, 신앙이 하나로 융합되어 영원한 아름다움과 초월성을 구현한다. 성스러움과 예술, 현실과 영원을 조화시키고자 했던 신라 문명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석굴암을 재현한 몰입형 설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웅장한 석가모니불을 실제와 유사한 환경에서 감상하며 전시의 마지막을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 Guimet -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Photo: Han Jisoo
전시장을 둘러보는 내내 경주를 여행하며 마주했던 풍경과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왕실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제 장신구, 불교 조각, 공예품 등 평소 한국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대표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신라 금관과「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에서 공개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 사로국의 형성부터 마립간 시대, 삼국 통일,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역사를 시대별로 촘촘하게 풀어낸 전시 구성도 인상적이었다. 신라가 지닌 문화적 깊이와 국제성을 해외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한 수준 높은 전시였다.